주자서당은 어떻게 글을 배웠나 - 10점
송주복 지음/청계(휴먼필드)
 
요즘 책읽기는 그저 당장 써먹기 위한 수단이다. 즐겁기 위해 소설을 읽고, 시험을 위해 수험서를 읽고, 독후감 숙제를 위해 억지로 고전을 읽는다. 빨리 읽고 쉽게 이해하고 당장 써먹어야 한다, 이런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혀, 진지함과 느긋함이 없다.
 
옛 사람들의 책읽기는 안 그랬다. 그들의 책읽기는 순수하고도 아름다웠다. 자기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을 알기 위해,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깨닫기 위해, 그들은 책을 읽었다. 책읽는 과정이 목적이었다.
 
요즈음 인격 수양을 위해 책을 읽는다면, 미친 놈 취급한다. 한 권을 몇 년씩이나 잡고 파고드는 사람을 보면, 바보라고 놀린다. 중국 송나라 서당 사람들은 그랬다. 그들은 미친 듯이 책에 빠져들었다. 바보처럼 집착했다. 그런 사람들의 독서법을 살펴보자.
 
주희의 주자학. 그 주자학의 핵심은 "주자어류"에 있다. 그 중에 10, 11권은 독서법에 관한 것이다. 그 부분을, <주자 서당은 어떻게 글을 배웠나>는 우리말로 옮기고 풀어 쓴 책이다.
 
첫 글. 讀書乃學者第二事. 독서는 배우는 사람의 두 번째 일이다. 그럼 첫 번째 일이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책읽기의 목적이다. 글쓴이는 이렇게 풀이한다. "'첫 번째 일'이란 스스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자기가 본래 갖고 있는 본성을 찾기 위해서는, 혹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삿됨을 죽여야 한다."(23쪽) 이러니, 독서법은 진지하고 엄격할 수밖에.
 
다음을 읽어 보면, 독서의 완벽주의를 추구한다. "대체로 책을 볼 때는 보고 또 보며, 단락과 구절 그리고 글자에 따라 차례대로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 여러 해설과 주석을 참고해서 가르침이 철저하고 완벽하게 이해되고, 그래서 도리와 자신의 마음이 서로 수긍되게 해야 한다. 독서는 자신의 도리를 투철하게 하나로 받아들이려는 행위이다."(31쪽) 이건 시작일 뿐이다.
 
그 다음에 이르면, 이건 수도승 생활이다. "대문을 빗장질하고 지게문을 닫아걸어 사방을 차단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독서할 때이다."(49쪽) 이건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다. 꼭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조용한 곳에서 차분하게 책을 집중해서 읽을라는 충고를 좀 과장한 거겠지. 그런데, 뒤로 갈수록 표현이 살벌하다.
 
"글을 볼 때는 모름지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아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몸을 똑바로 세우되, 너무 피곤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만 마치 칼을 등뒤에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54쪽) "모름지기 한 번 때렸으면 한 줄기 흔적이 남아야 하고, 한 번 쳤으면 한 움큼 피가 묻어나야 한다. 남의 글을 볼 때도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하니, 어찌 글을 소홀히 볼 수 있겠는가?"(58쪽) 독서는 단지 읽는 일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이런 무시무시한 긴장감이 있어도 서둘지 않는다. "독서할 때 마음을 느긋하게 먹으면, 도리는 저절로 나타난다. 만약 근심하거나 서두르게 되면, 도리는 끝내 끌어낼 방법이 없게 된다."(66쪽)
 
미련할 만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읽는다. "무릇 사람이 열 번을 읽고도 이해되지 않으면 스무 번을 읽고, 다시 이해되지 않으면 서른 번을 읽고, 그렇게 쉰 번까지 이르면 모름지기 이해되는 순간이 있게 된다. 쉰 번에도 깜깜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자질이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열 번도 읽어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글이라고 말한다."(102쪽)
 
선입견을 철저하게 없애고 읽는다. "마음을 풀어놓고 그의 주장을 기준으로 그의 주장을 보고, 사물을 기준으로 사물을 보아야지, 자신을 기준으로 사물을 보지 않아야 한다."(200쪽) "독서는 마치 사람의 일을 묻는 것과 같다. 그 일을 알고 싶으면 모름지기 그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은 도리어 그 사람에게 묻지 않고, 단지 자신의 생각으로 헤아려서 '반드시 이럴 것이다'라고 말한다."(239쪽)
 
야, 정말 대단하군! 이렇게 감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시대의 차이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역사 상식만 있어도 이런 완벽주의 독서가 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옛날 책은 오늘날 책과 다르다. 우선 책이 많지 않았다. 책을 구하기 힘들었기에 기억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다독보다 정독, 속독보다 숙독이 익숙했다. 더구나 종이책이 나온 건 최근이다. 대나무에 썼기에, 수레로 옮길 정도로 무거웠다. 비단은 가볍지만 비쌌다. 옛날 글은 오늘날 글과 다르다. 정보 전달보다는 주술적 의미가 강했다. 게다가 글을 읽는 것은 곧 자기 수양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태도가 진지했다.
 
요즘 사람들은 옛날 사람의 그런 철저한 독서법을 따라하지 않는다. 책은 쉽게 구할 수 있다. 글은 주술적 의미가 없어졌다. 자기 수양을 위해 책을 읽는 사람도 거의 없다.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아직 그 의미가 희미하게 남아 있긴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옛날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들이 책을 읽는 열정과 순수를, 정성과 노력을, 진지함과 엄격함을 말이다.
Posted by 빅보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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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문당 2011.01.20 07: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이야기 해주셨네요. 트위터로 글 보내봅니다. ^^

  2. 두사람웨딩 2011.01.20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교양도 아니고 수양도 아닌 책읽기를 하고 있었네요.
    어려운 책은 피하거나 슬며시 덮어서 구석에 꽂아 넣는 등..
    반성이 많이 됩니다. 이 책이 판매하고 있을까요? 나온지 꽤 된 것 같네요.
    중고책방에서라도 알아봐야겠네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3. 익명 2013.04.29 13: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준다 2014.08.15 0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학의 공부(성인이 되는 과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내면의 덕성을 함양하는 것과 묻고 배우는 일에 말미암은 소위 존덕성, 도문학(중용). 주자는 이 두가지의 병행을 강조하면서도 도문학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묻고 배움은 물론 자기 스스로 하는 것(주자어류 권13)이지만 거기에는 모범으로 삼아야 할 텍스트가 존재해야 하고, 주자는 그 텍스트를 유교경전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양은 방대하고 성인 되는 길은 머니 치밀하고 치열하게 책에 파고들어야겠지요. 주자 이후로(특히 수제자 진북계가 도문학을 존덕성 위에 둔 이후로) 송대 유학자들에게 독서는 자신들의 미션인 성인 되기의 소중한 루트였던만큼 오늘날의 독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