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겼다. 한 쪽을 여러 번 읽기도 했다. 읽다 자다 깨다 읽다. 반복했다. 늦게까지 도서관에 남아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잡다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탐독했다고 할 수 없다. 그냥 한 번 읽었다.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 이후로 쓴 것인데, 그래서 그런지 <죄와 벌> 이야기를 <백치>에 몇 부분 넣고 있다.
<백치>는 산만하다. 무수한 등장 인물들과 많은 이야기들. 소설의 결말은 모호하다. 큰 줄거리와 상관없는 작가의 체험담(사형 직전에 살아 남은 것, 도박, 간질병 등등)에 여러 잡다한 것들이 담겨 있다.
그래도, 중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똑같지는 않다. 오히려 작가를 많이 닮았다.) 이상형 주인공 미쉬킨 공작의 이야기이다. 미쉬킨 공작은 백치다. 주변 사람들마저 그를 백치라고 부른다. 그가 백치임에도, 사람들은 그에게 가서 고백하려고 하고 그의 인격에 감동을 받는다. 그를 사랑하는 나스타샤와 아글라야. 또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 이야기. 돈, 결혼, 사랑, 사회 비판, 뭐 이런 이야기들이라고나 할까. 그리스도를 닮은 미쉬킨 공작은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결국 치료를 받았던 스위스로 돌아간다.
무신론자 이폴리트가 자신의 논문을 낭독하는 부분에서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는데, 스티븐 킹 공포 소설을 능가할 정도로 으스스하다.
작가의 인식 테두리를 볼 수 있었다. 공작의 입을 통해 쏟아 내는, 로마 카톨릭과 무신론에 대한 비난, 그리고 러시아의 종교와 사상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 또 공작의 입으로 말하는, 러시아 상류계급 비판.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유럽 여행 직후 쓴 것이라서 유럽 사회에 대한 실망감과 비난도 보인다.
도스토옙스키가 택한 것은 결국 러시아 정교였고, 참된 그리스도 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신론자들의 회의를 어떻게 해서든 반박하려 했다. 만년의 작업은 결국 이것에 치중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 작업이 최고로 다다른 미완성 작품이다.
'독서 > 열린책들 세계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자살 클럽] 열린책들 세계문학 224 - 위험한 모험과 기괴한 사건으로의 초대 (0) | 2014.11.07 |
---|---|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 유령보다 무서운, 생각의 나사못 (0) | 2014.10.19 |
{추천도서} 앙투안 갈랑 [천일야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136 137 138 139 140 141 - 이야기하는 이야기 (0) | 2014.07.02 |
제임스 미치너 [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004 005 - 문학동네 이야기 (0) | 2014.06.02 |
도스토옙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 '죄와 벌' 코미디 독백 버전 (0) | 2014.05.16 |
도스토옙스키 [백치] 열린책들 세계문학 015 016 - 예수 그리스도 형상화 (0) | 2014.04.21 |
도스토옙스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029 030 031 - 신, 인간, 죄 (2) | 2014.04.18 |
폴 오스터 [뉴욕 3부작] 열린책들 세계문학 038 -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 (0) | 2014.04.16 |
에드몽 로스탕 [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027 - 진실한 사랑 (0) | 2014.04.15 |
이탈로 칼비노 [우주 만화] 민음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007 - 우주의 모든 것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 (0) | 2011.12.08 |
막심 고리키 [어머니] 열린책들 세계문학 009 (1) | 2011.11.21 |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