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연주자별 감상

크로셰, 레빈, 그리모, 벨더, 니콜라예바, 폴리니, 피셔, 휴이트, 굴다, 리히터, 투렉, 쉬프, 굴드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의미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전주곡과 푸가가 짝을 이룬 48곡을 묶은 작품이다. 그래서 부제가 '48곡의 전주곡과 푸가'다. 두 권으로 나누어 각각 24곡씩 담았다. 1권은 1722년에, 2권은 1744년에 완성했다. 전주곡과 푸가를 각각 따로 한 곡으로 본다면 총 96곡이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 1, 2권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곡이다. 여기서 평균율이란 한 옥타브를 12개의 반음으로 나눈 조율법을 뜻한다. 바흐가 12개의 음을 주음으로 장조와 단조로 작곡해내기 전까지는 머릿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겼다. 이 조율법은 바흐 당시에 이론적으로 거론할 뿐 실제로 그게 가능한지는 증명되지 않았었다. 바흐는 이 조율법을 1권과 2권으로 두 번이나 증명해 보였다.

이 곡의 작곡 목적은 자신의 아들과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음악을 공부하는 이들의 연습곡이다. 주변에 서양 음악을 전공한다는 사람이 있거든, 바흐의 평균율 클라이버곡집을 아느냐고 물어보라. 모른다고 말하거나 한 곡도 연주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서양 음악의 기본을 모르는 것이다.

바흐 당시에는 피아노와 비슷한 클라비어가 있었다. 오늘날 평균율을 클라비어로 연주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피아노로 연주한다.

피아니스트한테 이 곡은 생명 같은 존재다. 자신의 연주 기량을 높이는 데 유용할 뿐더라 실제로 공연하여 자신의 밥벌이를 한다. 피아노 연주자는 이 곡을 거의 날마다 연주한다. 하루라도 이 곡을 연주하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다고 느낀단다.

연주자는 물론이고, 감상자에게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일용할 양식이다. 음악의 기본과 그 기본이 얼마나 다양하게 나아갈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곡마다 섬세한 아름다움이 단단한 구조의 조각품처럼 펼쳐진다.

가끔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는 곡을 교과서처럼 여겨서 그런 듯하다. 처음부터 흥미롭게 전곡을 다 듣지 않았다. 일단 몇 곡만 골라서 반복해서 들었다. 나중에야 전곡을 빠짐없이 쉼없이 듣게 되었다. 계단을 하나씩 오르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곡 하나하나가 차곡차곡 쌓여 거대한 성이 되는 모습을 본다. 한 곡만 듣는다면, 당신은 고작해야 계단 하나만 올라 본 것이다. 정상을 오르려면 연속해서 다 들어야 한다. 등산과 비슷하다.

클래식을 듣고자 한다면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기본 중에 기본이요, 필수 중에 필수요, 핵심 중에 핵심이다. 이 곡을 건너 뛰고 얼렁뚱당 그저 나 좋아하는 곡만 듣다가는 죽도 밥도 라면도 안 된다. 기본이 안 된 상태에서 세부가 잘 되겠는가. 세부를 듣고 흥미를 느꼈다면 그 근본을 찾아라.

바흐의 음악은 건강에 좋다. 96곡 중에 마음에 드는 곡을 적어도 하나는 발견할 수 있으리라. 그 곡을 반복해서 들어보라. 자신도 모르게 아픔이, 그게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사라짐을 경험하리라. 그리하여 언젠가는 무한한 우주를 느끼리라.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C장조 전주곡이 나오는 영화

이 곡을 처음 들었던 것은 영화 [바그다드 카페]였다. 흑인 소년이 자기가 치는 피아노 소리의 황홀경에 빠진다. 피아노 소리가 느리고 부드럽고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독일 백인 아줌마 앞에서 미국 흑인 소년이 치는 바흐! 이 장면을 어찌 잊으랴.

바그다드 카페 UE (무삭제 확장판) - 10점
퍼시 애들론 감독, 마리안느 제게 브레히트 외 출연/에이나인미디어


연주자별 감상

이 곡의 부드러운 선율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글렌 굴드다. 그의 연주를 처음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날 잠이 안 왔다. 그는 이 곡에 대한 나의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 미워 죽겠더라. 지금이야 놀란 가슴을 쓸어안으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후에야 듣지만. 딱딱 끊어진 음, 편히 받아들이기 힘든 해석이다. 

그럼에도 뒤에 이어지는 연주를 계속 들으면 오히려 이런 연주가 이 클라이버곡집을 선명히 드러낸다. 굴드 중독이라는 게 그렇다. 처음에는 이게 뭐야 말도 안 된다며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이거밖에 없다. 아예 다른 연주자의 해석을 도저히 못 받아들이게 할 정도에 이른다. 굴드는 조심해서 들어야 한다. 그가 흥얼거리는 마법 주문에 걸리면 당신은 듣기를 멈출 수 없으리라. 굴드가 몸을 움직여서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마저 당신의 귀를 사로잡으리라.

닥치고 굴드다. 최고다.

 1,2권 합본 시디로 나왔다. 합본 시디 가격이 더 저렴하다! 

[수입]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 : 평균율 전집 1, 2권 BWV 846-893 [4CD] - 10점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굴드 (Glenn Gould) 연주/SONY CLASSICAL

 

안드라스 쉬프
는 적절한 빠르기와 이어짐으로 연주했다. 나의 환상을 회복했다. 음을 이토록 부드럽게 이어서 치다니, 오호! 연주자의 숨소리마저 매끄럽게 들린다. 멀리서 아련히 들리는 과거 회상처럼 몽롱하다. 아름답다.
 
 

로잘린 투렉은 견고하게 쳤다. 온몸으로 음을 하나하나 꾹꾹 누른다. 으악! 그렇게 치다가는 머리카락 다 빠질 텐데. 체력 소모가 무척 심하리라. 음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며 퍼진다. 정밀한 구조에 몰입한 터치다. 거장의 솜씨다. 완벽하다. 1번 전주곡 끝 음을 치고 손가락을 떼는 그 순간, 어마어마하게 느껴지는 무게감이란, 감격이다. 

BBC에서 깨끗한 음질로 다시 내 놓은 음반이다. 기존 음질과는 확연히 다르다. 비싸더도, 이미 다른 제작사에서 낸 음반을 갖고 있더라도, 구입해서 들을 가치가 있다. 투렉의 음성 해설도 들을 수 있다. 1975/76년 공연.

[수입] 바흐 : 24개의 전주곡과 푸가 1-2권 (4 for 2) - 10점
바흐 (J. S. Bach) 작곡, 로잘린 투렉 (Rosalyn Tureck) 연주/Documents

Docutments. 1952/53년 연주.

음질이 썩 좋지 못해서 소리를 줄여서 들어야 한다. 투렉의 단단한 연주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음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퍼진다. 화사한 꾸밈이 없어 깔끔하다. 한 음 한 음이 벽돌처럼 느껴진다.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정신이 확고해진다. 정신을 집중하고자 할 때 듣는다. 음질이 좋게 나온 BBC 앨범보다 더 자주 듣는다.

[수입] 바흐 : 평균율 클라비어 전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6CD] - 10점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투렉 (Rosalyn Tureck)/DG

DG에서 1952/53년 평균율과 골그베르크 변주곡을 합본해서 냈다. 주의할 점은 평균율 음반은 모노라는 점이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는 영롱한 소리를 낸다. 음의 최상급 투명함이다. 처음에 듣고 혹시 내가 음장 효과를 넣었나 의심할 정도였다. 맑디맑고 곱디곱다.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외계인을 본 것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었다. 외계인을 봤어도 이만큼 놀라진 않았으리라. 리히터가 종종 처음 만난 후배 피아니스트에게 "어느 별에서 왔니?" 하며 농담을 했단다. 리히터는 내게 바로 그 질문을 던지게 했던 연주자다. 지구인이 이렇게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게 피아노 소리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충격이다. 나는 이 연주에서 피아노 예술의 최고 지점을 봤다. 그는 음의 경계를 넘어 버렸다. 어떻게 사람이 피아노로 이렇게 칠 수 있을까.

무조건 들어라. 다만, 낭만주의적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반감을 느낄 수 있다.

바흐 : 평균율 클라비어 전곡집 [4CD] - 10점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리히터 (Sviatoslav Ric/Eurodisc

아래 것보다 더 싸게 파는 음반이 나왔다. 같은 음원이니까 이왕이면 이거로. 표지는 아래 거나 더 예쁘긴 하다.

[수입] J.S Bach - Well Tempered Clavier I,II / Sviatoslav Richter - 10점
바흐 (J. S. Bach) 작곡,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Sviatoslav Richt/소니뮤직(SonyMusic)


프리드리히 굴다
의 피아노 터치는 또랑또랑 울린다. 곡을 깔끔하게 친다. 시원하다. 아이스 커피 맛이다. 포스트모던하달까. 상당히 현대적이다.

BWV 846 연주하려고 다시 들어봤는데, 굴다가 이 곡 전주곡에서 보여주는 레가토는 환상적이다. 매끈하다. 어떻게 저렇게 건반을 누를 수 있는 것일까. 꾸밈음 처리가 경쾌하다. 맑은 종소리처럼 들린다. 이게 정말 피아노를 쳐서 난 소리란 말이야? 못 믿겠어. 대단하고도 특이한 예술가다. 어떻게 이렇게 치냐고.

클래식의 명확함과 재즈의 자유로움이 기묘하게 조합된 연주다. 한쪽 취향에 몰입된 사람한테는 이도 저도 아니라서 싫어할 수도 있겠다. 취향이라는 게 워낙 다양하고도 무지 고집스러운 거라서.

Johann Sebastian Bach - The Well Tempered Clavier Book 1 / Gulda - 10점
바흐 (J. S. Bach) 작곡, Friedrich Gulda (Piano) 연주/유니버설(Universal)
Johann Sebastian Bach - The Well Tempered Clavier Book 2 / Gulda - 10점
바흐 (J. S. Bach) 노래, Friedrich Gulda (Piano) 연주/유니버설(Universal)


안젤라 휴이트
는 단정하고 바르게 친다. 간결한 맛이 있다. 작은 뮤직박스의 청아한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수입] J.S. 바흐 :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전곡 - 10점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휴이트 (Angela Hewitt)/하이페리온 (Hyperion)
 
[수입]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전곡 [4 FOR 3] - 10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휴이트 (Angel/하이페리온 (Hyperion)
 

에드윈 피셔
는 빠르고 신나게 친다. 그러면서도 단단하다.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올망졸망 랄라랄라 이렇게 계속 중얼거린다. 창유리에 떨어진 빗방울이 또르르 흐르듯 음이 흐른다. 경쾌함이 날아오른다. 리히터의 연주에 버금가는 유일자다. 모노에 그다지 좋지 않은 음질이지만,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장인의 터치는 살아있다.

[수입]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48개의 전주와 푸가 BWV846~893 (3CD) - 10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에드윈 피셔 (Ed/Documents

음원 저작권 시효가 끝난 모양이다. 그래서 여러 음반사에서 앨범을 냈는데, 같은 음원이다. 그러면 가장 싼 시디는 Docutments에서 나온 앨범이다.

[수입] 바흐 :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3CD) - 10점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에드윈 피셔 (Edwin Fisch/EMI Classics


마우리치오 폴리니
는 바흐를 안 칠 줄 알았는데, 덜커덕 바흐 평균율 1권 음반을 내 놓으셨다. 쇼팽의 느낌으로 친 바흐는 엄격한 느낌에 익숙한 내게 어색했다. 하지만 몇몇 곡에서는 따사로운 생명력이 잘 살아나서 흥미로운 재미를 선사해줬다. 낭만주의적 해석이 싫은 사람은 그다지 매력이 없겠지만 말이다. [더 자세한 리뷰]

마우리치오 폴리니 : 바흐 평균율 1 [2CD] - 10점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폴리니 (Maurizio Polli/유니버설(Universal)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의 바흐 평균율 연주는 쇼스타코비치의 격찬으로 유명하다. 니콜라예바의 터치는 풍성한 여유로움이 특징인데, 동양적인 여백미를 살렸다는 평을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는다. 느리고 장중하면서도 다음 음이 어떻게 연주될지 모르는 긴장감을 조성해서 특유의 역동성을 창조한다. [더 자세한 리뷰]

Tatiana Nikolayeva -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 10점
바흐 (J. S. Bach) 작곡,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Tatiana Nikolayeva/아울로스(Aulos Music)


피터-얀 벨더
는 피아노가 아니라 하프시코드로 연주했다. 덕분에 장식음이 잘 살아있다. 바로크의 화려함이 강조되진 않아서 오히려 절제가 느껴진다. 자연스러운 느낌인데, 이 때문에 오히려 밋밋한 감이 없지 않다. 전반적으로 밝은 느낌이 좋다. [더 자세한 리뷰]

[수입] 바흐 : 평균율 전곡 (1,2권) [4CD] - 10점
바흐 (Jean-Sebastien Bach) 작곡, 벨더 (Pieter-Jan Belder/Brilliant Classics


엘렌 그리모
의 터치는 냉정하다. 감정에 빠지지 않아서 감정을 강조하는, 역설적 연주다. 종종 여자 글렌 굴드로 불리는데, 그만큼 아티큘레이션이 독특하고 훌륭하다. 셈여림 조절을 아주 섬세하게 해서 듣는 사람을 황홀경에 빠트린다. 특히, 피아노시모는 귀신 같은 솜씨다. 듣고 있으면 진절머리가 날 정도다. [더 자세한 리뷰]

바흐 : 엘렌 그리모 - 10점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엘렌 그뤼모 (Helene Grim/유니버설(Universal)


로버트 레빈
은 곡마다 건반 악기를 번갈아 가며 친다. 단일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불만이었다. 나중에는 각 곡에 어울리는 악기의 선택이 절묘해서 감탄했다. 바흐는 이런저런 악기에 어울리게 쓴 곡을 가져다가 모아 놓았으니, 원래의 악기를 찾아 연주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특히, BWV 857 1권 f단조 전주곡은 오르간으로 쳐야 제맛이 난다. 피아노나 하프시코드로는 웅장한 느낌이 나지 않는다.

바흐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 연주 앨범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명반과 연주자가 넘쳐나지만, 여전히 이 곡의 다른 해석과 다른 스타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추천으로 알게 된 것이 바로 이 에블린 크로셰다.

앨범을 구하기 상당히 어렵다. 유튜브에 올라온 것으로 들었다.

한마디로, 마음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연주다. 지나치게 간결하지도 지나치게 기교를 부리지도 않는다. 연주자의 심성인 듯 음은 하나같이 다정한 포옹처럼 따스한 웃음처럼 흐른다.

내 개인 취향으로는 이게 가장 잘 맞는 것 같다.

[수입] 바흐 : 평균율 전곡 [4CD For 2] - 10점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크로셰 (Evelyne Croche/Music & Arts
Posted by 빅보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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