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핑 베토벤 (2disc) - 10점
아그네츠카 홀랜드 감독, 에드 해리스 외 출연/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아시겠지만, 강조합니다. 이 영화는 허구입니다. 역사소설이 역사가 아니듯, 영화도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식으로 접근해서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역사소설이 있고 이런 영화가 있는 겁니다. 역사적 상상과 역사적 사실은 구분하세요.

자, 역사적 상상 속으로 들어가 보죠. 베토벤이 살던 시대로 갑니다. 우리는 뭐로 등장할가요.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우리는 이 영화에서 뭐로 등장하면 좋을까요. 감독은 베토벤의 초고 악보를 깨끗하게 복사하는 여자가 되어 보라고 제안합니다. 지적이고 단정하며 정숙한, 안경 낀 젊은 여자. 이 여자가 베토벤에게 다가갑니다. 우리가 다가갑니다.

베토벤은 역시나 첫인상이 괴팍합니다. 괴물이죠. 영감이 넘치는 음악가죠. 하지만 같이 지내보니까 참 소탈한 사람입니다. 초고에 대한 지적도 처음엔 화를 내다가 맞는 말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말 잘 듣는 우리 베토벤.

재능이 넘치는 베토벤. 그의 그림자로 조카가 있습니다. 조카는 재능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베토벤은 재능을 강요하죠. 그가 주는 돈 때문에 그 강요를 참고 있을 뿐이죠.

삼각관계를 이룹니다. 사랑의 삼각관계가 아니라, 예술의 삼각관계죠. 재능이 넘치는 천재 예술가. 그 예술가의 영혼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청중. 그 예술가의 예술을 질투하는 자. 베토벤은 우리/여자에게 예술을 이해하지 말고 느끼라고 하죠. 예술은 침묵이 핵심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음의 발산이 아니라 음과 음 사이의 침묵에 주목해야 하는 겁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예술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다른 것이겠죠.

사람의 영혼과 감정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그건 쓰레기다. 집어 치워라. 영화에선 그렇게 말합니다. 영혼의 예술과 물질의 기술은 그렇게 다른 걸까요.

여자에겐 애인이 있습니다. 건축갑니다. 무슨 다리를 짓는다네요. 기술이야말로 가장 오래 남는 예술이라면 큰소리를 치죠. 베토벤의 음악 따윈 사라질 거라고. 물론 그가 틀렸죠. 건축은 전쟁으로 다 부셔지고 망가져도, 베토벤의 음악은 계속 새롭게 탄생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베토벤을 격려하고 응원합니다. 외롭고 세련된 감성의 소유자가 그렇듯, 그는 두려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합니다. 여자는 그에게 도와주겠다고 말합니다.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는 예술가를 진정으로 도울 수도 있는 거죠. 혹시 남녀의 에로스적 사랑을 바란다면 포기하십시오. 그런 거 없습니다. 예술을 통한 우정이라고 해 두죠.

교향곡 9번 합창 초연의 현장에 여자는 참여합니다. 불멸의 탄생에 우리가 있는 거죠. 또한 한 예술가의 창작 과정과 그의 마지막까지 함께 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더 구체적으론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역사적 사실로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초연은 썩 좋지 못했다고 하죠. 당연하죠. 귀먹은 베토벤의 지휘였으니까요.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악보를 복사해 주는 여자도 없었고요. 상상이라니까요! 택시 잡듯 마차 부르고. 유명 가수의 콘서트 뒤풀이 현장 같은 모습. 사극을 적당히 현대식으로 풀어놓은 거죠.

배우 선택을 신중하게 한 것 같군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정도로 골랐습니다. 배우가 너무 매력적이면 이야기 전개에 몰입하기 힘들고 너무 멋이 없으면 영화를 계속 보기 어렵죠. 소탈한 베토벤과 지적인 여자. 딱 여기까지만 표현하도록 연기의 감정선을 조절했습니다. 초반에 어지러운 화면과 달리 영화 전반은 차분합니다. 엔딩도 그렇고요. 뭔가 흥분시키는 무엇을 바라진 마세요. 이 영화에서 흥분할 건 거의 없죠.

Posted by 빅보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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