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 10점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열린책들
가난한 사람들 -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 10점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열린책들

첫 작품인데도 이 정도면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이 책 끝에 붙은 작가 연보(231쪽)에 보니 정성을 들여 퇴고했다고 하지만, 글에서 보이는 광휘는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 후에 작품의 발전은 양적인 것이지 질적으로는 그다지 없었다. 다루는 주제의 폭을 넓힌 것이 질적 향상으로 친다면 발전했다고 봐야겠지만. 이 작품 이후 문체는 불변이다.

나중에 쓰여질 '죄와 벌'이 이 소설에서 보인다. 가난에 찌든 인간의 모습. 절대 빈곤이 사라진 요즘이지만 여전히 공감하게 되는 건 뭘까. 절대적 가난을 사라졌어도 상대적 가난은 여전하니까 그런가. 읽는 내내 돈이 뭔지, 사는 게 뭔지, 나도 모르게 푸념하더라.

작가가 그리는 가난은 인간적인 가난이다. 문학적 상징으로 만들어낸 가난이지 사실적 실제 가난의 모습은 아니다. 가난을 있는 그대로 글로 그려냈다면 그 글을 읽고 감동할 사람은 없다. 가난한 사람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모는 것이 작위적이지 않나 싶다. 첫 작품이라서 더 그렇게 보인다. 때마침 사람이 죽고 등장인물은 대개들 다치거나 병에 걸린다. 참 편리하게도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제목과 달리 달랑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는 서간체 소설이다. 가난하지만 교양이 나름 높은 젊은 여자,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와 역시 또 가난하고 교양도 없지만 마음은 착한 늙은 남자 하급 공무원 마까르 제부쉬낀. 두 사람 사이의 러브레터 겸 일상잡담 편지다.

작가 특유의 장광설은 그가 쓴 어느 작품에서건 나타난다. 첫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등장인물이 끝도 없이 쉼 없이 혼자서 지껄인다. 미친 사람처럼 떠들어댄다. 말이 쏟아지는 중에 갑작스럽게 빛을 내며 감동을 만든다. 그 열띤 말의 끈질긴 당김으로 인간 내면을 끌어낸다.

이야기 속 이야기로, 여주인공 바르바라의 회상에서 열한 권짜리 뿌쉬낀 전집을 사주고 난 후 벌어지는 비극은 '죄와 벌'에 나오는 '여윈 말' 이야기보다는 덜 하지만 독자의 심장을 쥐어짜내는 듯 격렬하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미쳐버린 아버지가 그 아들이 그토록 좋아해서 사 주었던 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떨어뜨리고 줍기를 반복하며 장례를 치르는 모습이라니. 도스토옙스키다운 캐릭터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 감정의 폭발로 더는 제정신일 수 없는 사람. 갈 데까지 간 사람.

고골의 유명한 소설 '외투'에 대해 불평하는 마까르의 수다를 읽다가 어찌나 웃기던지. "도대체 그런 글은 왜 쓴답니까? 그런 게 왜 필요하대요? 이런 책이 나오면 독자 중 누군가가 외투라도 하나 장만해 준답니까? 새 신발이라도 사준대요?"(117~118쪽) 책 맨 앞에 왜 요상한 인용 글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최고다!

'외투'는 바르바라가 마까르한테 읽어 보라고 빌려 준 책에 있다. 마까르는 문학작품이라는 일컫는 고상한 소설 대신에 싸구려 인기소설을 높이 평가한다. 의도적으로 여자와 대조시키기 위해 남자를 가난하고 무식한 인물로 그려놓았다. 각자의 문학 소양은 편지의 문체에도 잘 드러난다.

남자 주인공이 직장 상사한테 야단을 맞던 중 자신의 옷에서 단추가 떨어지고 그걸 줍고 최악의 상황으로 간다. 그러다 곧바로 직장 상사가 고액권 지폐 한 장을 주며 일 다시 잘하라고 하자 우리 주인공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인생의 희비극을 이토록 절묘하게 써내는 도스토옙스키 선생은 역시 문학의 신이다.

독자를 울리고 웃기는 재능이 반짝이는 소설이다. 가볍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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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소리 좋은 빅보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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