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집의 수수께끼 - 8점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이철범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장편 '빨강집의 수수께끼'는 초보자를 위한 추리소설로 좋다. 1922년 발표작인데, 추리소설의 기본을 잘 갖춘 소설이라서 오늘날까지도 '재미있게' 읽힌다. 

 

아마추어 탐정을 자처하고 나선 주인공과 그의 추리를 들어주겠다고 나선 보조자가 수수께끼 같은 살인의 진상을 밝혀 나아간다. 유머소설풍의 추리소설이다. 진지한 범죄수사가 아니라 즐거운 탐정놀이 분위기다. '곰돌이 푸'로 유명한, 밀른의 따스하고 여유로운 문체가 돋보인다. 소설 초반부터 웃긴다.

 

밀실살인과 비밀통로. 추리소설 많이 읽는 독자한테는 시시하기 그지없다. 시작부터 트릭을 알아버리는 사람도 있으리라. 너무 낡고 너무 반복해서 쓴 트릭이라서 그렇다. 고전추리소설은 등장인물이 완벽한 연기를 해서 주변 사람들을 속인다. '연기의 신'은 옛날 추리소설에서는 암묵적 동의를 하고 읽어야 한다.

 

허술하고 헐렁하게 쉽게 쓴 듯 보이나 나름 세심하게 추리한다. 비밀통로의 경우 영화에서 흔해 빠지게 나오는 서재 비밀문이다. 특정 책을 빼거나 그 책 뒤에 문을 여는 장치를 누른다는 식이다. 문제는 과연 어떤 책이냐이다. 이를 차분하게 상식적으로 풀어내는 솜씨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평범한 상식의 소유자라서 맞출 수 있는 추리다. 사람들이 읽을 생각을 하지 않는 책이 바로 비밀통로로 가는 책이다.

 

밀실트릭은 알고나면 허무해서 죽을 지경이 되는 게 보통이다. '노란방의 수수께끼'만큼이나 허무하다. 하지만 뭔가 유별난 장치나 기발한 속임수가 아닌 눈에 뻔히 보이고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트릭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홈즈처럼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자가 아니라 단지 기억을 잘 하는 편인 보통 사람이 탐정이다.

 

앨런 밀른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따라하면서 조롱한 후 더 발전시킨다. 이 책 98쪽에서 셜록 홈즈가 하숙집 층계가 몇 개인지 알아맞춰 왓슨을 골리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놀린다. "층계 수를 알고 싶으면 하숙집 아주머니를 불러서 물으면 되는 거지." 그리고나서 주인공 탐정 '길링검'은 놀라운 기억력을 선보인다. 그는 완벽하게 기억한다.

 

작가는 대놓고 도일의 홈즈 소설을 골려먹는다. "자네의 와이셔츠에 묻은 딸기 얼룩을 보고 자네가 식사 뒤에 딸기를 먹었다고 추리하면 되는 거지? 여어, 홈즈, 자네에게는 완전히 놀랐는걸? 뭘 그래, 내가 늘 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97쪽)

 

밀른이 보기에, 왓슨은 홈즈처럼 멍청이다. 왓슨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듣거나, 귀찮게 질문하거나, 얼간이처럼 비웃음을 받거나, 내가 이미 캐낸 일을 며칠 뒤에야 간산히 발견하고는 기뻐하는"(97쪽) 바보 역을 자처한다.

 

애석하게도 이 소설의 탐정 길링검은 이번 사건만 활약하고 끝이다. 마지막 문장은 다음 편을 예고하는데도 말이다. "그럼, 잊지 말게나. 그들 중에 누가 살해당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곧 나를 불러주게. 드디어 물이 오른 탐정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할테니!"(275쪽)

 

정확히 자기 능력껏 쓰고 시리즈를 잇지 않았다.

 

이 책에는 부록으로 단편소설 한 편이 있다. 아서 모리슨의 단편집 '명탐정 마틴 휴이트(Martin Hewitt, Investigator)' 중에 첫 번째 작품인 렌턴관 도난사건 (The Lenton Croft robberies)을 실었다.

 

보석 도난 사건인데, 아무리 봐도 도저히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세 건의 도난 사건에서 유일한 일관성과 동일성은 사건 현장에 타다 남은 성냥개비가 있다는 사실이다.

 

힌트를 주는데 주의해서 읽지 않게 되기 마련이라서, 다시 읽고서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도 그렇고 일상 사건이나 사람을 대할 때도 상식이나 선입견으로 바라보고 그렇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직업이 의사라고 하면 남자라고 생각한다. 여자 의사도 있다! 외국어대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외국어를 잘하고 전공이 외국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대학교에 이과도 있다!

 

이 단편의 수수께끼로 속이는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 자신이다. 자신의 선입견에 스스로 장님이 된다.

 

붉은 저택의 비밀 - 10점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김래경 옮김/블루프린트

 

전자책으로도 나왔다. 블루프린트, 김래경 번역. 표지며 제목은 진지하고 무시무시한 분위기인데, 실제 본문은 그렇지 않다. 곰돌이 푸의 작가 밀른이 썼는데 애드거 앨런 포 분위기일 순 없지, 아무렴. 뭐 그렇다고 동서문화사의 표지와 제목이 더 낫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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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소리 좋은 빅보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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