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 10점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열린책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 10점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열린책들


'죄와 벌'의 코미디 일인칭 독백 버전이 있었다. 아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도 이렇게 유쾌한 작품이 있다니! 책을 펴는 순간 지하로부터의 개그 콘서트가 펼쳐진다. 당신을 꽉 붙잡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고 속사포 독백이 쏟아진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실험적 풍자소설이다. '죄와 벌'의 주인공의 독백을 이 작품에서 자유롭게 펼친다. 읽고 있으면 아주 돌아버린다. 이 소심한 미치광이의 장광설이 진지함과 농담이 오락가락하며 독자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트위터 친구 한 분이 '죄와 벌'을 읽은 다음에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꼭 읽어보라며 "정말 분열적이다 못해 웃겨 죽습니다. 지드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가운데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이 작품을 고르겠다고도 했었죠."라고 추천했다. 정말 웃기더라. 걸작은 아니더라. '죄와 벌'의 스케치로 보인다. 자전적 독백도 섞여 있다.

시대를 앞서 간 것일까. 대단히 실험적인 소설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인 줄 알았다. 허구와 현실이 교차되고 대놓고 독자한테 말을 건다. 발표 당시 독자들한테 외면당했다. 지금도 그리 환영을 받진 못하리라.

수기 형식 소설이다. "나 자신만을 위하여 쓰고 있다. 그리고 내가 만일 독자들을 대하듯이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한 것이고, 그 이유는 그렇게 쓰는 것이 나에게는 더 쉽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나는 주장한다. 그것은 형식이다. 단순히 형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독자를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메타픽션. 허구의 허구. 현실을 끌어들인 허구다. "'당신은 어떻게…… 마치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녀는 말했고, 무엇인가 조롱하는 듯한 것이 그녀의 목소리에서 다시 울렸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웃겨서 미칠 것 같았다. 소설 텍스트 안에서 스스로 허구임을 밝히면서도 고집스럽게 이 지하 인간은 자기 말을 줄기차게 쏟아낸다.

주인공은 극도로 소심하며 지나치게 솔직하다. 농담과 자조 속에서 속물 비판을 비수처럼 던진다. "우리 시대의 모든 예의 바른 사람은 겁쟁이고 노예여야 한다." "그들에게 직위란 지성과 동등한 것이었다. 열여섯에 그들은 이미 편하게 돈벌 수 있는 직업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싸구려 행복인가 아니면 고상한 고통인가?" 가끔씩 툭툭 던지는 진지한 말이 무섭도록 매력적인 작가 도스토옙스키임을 입증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불행하고 진지한 사람들이 읽는 생명수다. 행복하고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한테는 난해하고 읽기 힘든 고전일 뿐이다. 당신의 삶이 비틀거리고 소외되고 미칠 것만 같을 때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라. 당신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문장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이토록 웃긴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조차 그렇다.

Posted by 목소리 좋은 빅보이7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