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라트비아인 - 매그레 시리즈 01 - 8점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열린책들

 

 

 

 

인간애를 담은 추리소설

 

전자책으로 처음으로 통독한 책이 조르주 심농의 '수상한 라트비아인'이 됐습니다.

 

전자책은 종이책과 달리 글꼴, 글자 크기, 줄간격, 들여쓰기, 배경색, 글자색 등을 내가 보기 편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종이책은 출판사의 편집본을 거부할 수 없지요.

 

전자책은 당연하게도 배송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구입하자마자 다운로드해서 바로 읽을 수 있죠.

 

저는 19권짜리 세트로 사서 하나씩 내려받아서 읽는 중입니다.

 

구입하고서야 알았는데, 매그레 시리즈는 19권에서 멈추었답니다. 더는 국내에 번역출간하지 못하는 상황이랍니다. 저는 그냥 19권이 전부인 줄 알았죠. 장편만 75편이 나왔다고 하네요.

 

전자책 얘기가 길었네요. 이제 소설 얘기를 해 보죠.

 

추리소설 중에 매그레 시리즈는 국내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습니다. 열린책들에서 야심차게 매그레 시리즈 전권 번역출판을 기획하고 홍보를 했지만요.

 

셜록 홈즈와 포와로의 수수께끼 풀이식 오락소설에 익숙해진 탓일까요. 단 한 번이라도 매그레 시리즈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확실히 기존 추리소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인공 매그레는 수사반장인데요. 그가 현장을 뛰면서 범인을 추적하고 잠복하고 범인과 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기존 탐정소설이 보여준 모습과는 다릅니다. 어떤 독자는 유럽 지도를 펴놓고 매그레의 동선을 따라가 본다고 해요. 그만큼 실감나게 정확히 묘사했습니다.

 

추리소설은 대체로 살인범 찾기 '놀이'거든요. 그래서 실제가 아닌 가상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설령 실제 시공간 배경을 이용한다고 해도 이름을 살짝 바꾸죠. 언론인 출신인 조르주 심농은 이런 스타일을 거부하고 현장감을 중시해요. 그래서 문장을 읽으면 정말 내가 매그레와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비를 맞으며 범인이나 용의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죠.

 

번역이라서 원문 문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방인을 쓴 알베르 카뮈의 전언("심농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방인'을 이렇게 쓰지 않았을 거다.")과 전반적인 문장 분위기를 보면, 간략하다 못해 바싹 태운 간결체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길게 늘어놓는 일은 없습니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의 트릭은 추리소설 웬만큼 읽을 사람들한테는 시시하고 예전에 너무 많이 봐서 식상할 지경에 이른 겁니다. 옛날 책은 옛날 책인 거죠. 이 트릭이 업그레이드된 최근 작품이라면 다이안 세터필드의 고딕소설 '열세번째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직 안 읽은 분들의 재미를 위해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런 느낌이 듭니다. 매그레는 범인을 동정하고 있구나. 추리소설에서 탐정과 범인은 서로 상극입니다. 서로 공감하며 이야기를 길게 나눌 상대는 아니죠. 탐정은 범죄자를 잡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의 '인간'을 추적합니다. 작품에서 '균열 이론' 또는 '틈'이라고 부르는 이 '인간 존재'를 체포합니다. 

 

매그레 자신이 남몰래 <균열 이론>이라 이름 붙인 일종의 원리 말이다. 이는 한마디로 모든 범죄자, 모든 악당의 내부에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초한 이론이다. ... 과학적 수단들을 활용해 왔던 게 사실이다. 다만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종의 <균열>을 찾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왔다는 게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다시 말해, 게임 상대한테 생기는 어떤 <틈> 사이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말이다. - 5장 술 취한 러시아인

 

추리소설에서는 범인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길게 자신의 범행을 실토하는 식입니다. 그래야 이야기가 명쾌하게 완결되거든요. 이 소설 '수상한 라트비아인'도 범인의 주구장창 긴 사연이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매그레 시리즈의 특징은 그 다음이죠.

 

매그레는 범인을 잡으려고 하지만 범인을 벌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범인을 이해해주고 범인의 말을 들어주고 그가 스스로 결정하게 내버려 둡니다. 여기서 미묘한 감동이 생기고 우직한 매그레를 사랑하게 되죠. 읽고나면 술 한 잔 하거나 담배 한 대 피우거나 오징어라도 씹어야 할 겁니다. 인생, 씁쓸하죠.

 

왜 그 많은 유명 작가들(세풀베다, 벤야민, 카뮈, 지드, 밀러, 엘리엇, 헤밍웨이)이 매그레 시리즈를 찬양하는지 그제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애가 담겨 있는 것이죠.

 

……

 

이로써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전자책으로, 이번에는 종이책으로. 처음에는 몸살 감기로 아픈 몸으로, 이번에는 건강한 상태로. 처음에는 뭐가 뭔지 트릭이 뭘까 궁금해 하면서, 이번에는 답을 알지만 과연 어떻게 독자가 궁금하게 이야기하는지 살피면서.

 

조르주 심농의 초기 단편 미스터리에는 이런 식의 구구절절 사연 가득한 범죄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전형적인 영국 추리소설처럼 수수께끼 풀이 게임만 있었다. 그러다가 매그레 반장이라는 우직한 캐릭터 하나를 탄생시키면서 범죄 수수께끼에 안타까운 인생살이를 놓았다.

 

범죄 게임만 이야기했더라면 매그레 시리즈는 성립되지 않는다. 시리즈 첫 작품에서 그가 쓰는 추리소설의 지향점은 확실하다. '인간적인 애정'이다. "죽을 고생을 다해 범죄자를 검거하고 난 뒤부터 바로 그 범죄자를 향한 인간적인 애정을 품게 되고, 감옥에 수감된 그를 찾아가, 마침내 교수대에 오르기까지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주는 형사들이 세상에는 부지기수인 것이다."(232쪽)

 

심농은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만들 줄 아는 소설가다.

 

……

 

전자책 - 종이책 - 다시 전자책. 세 번 읽었다. 추리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처음 읽었을 때의 재미나 호기심은 줄어든다. 이미 수수께끼의 답을 알고 어떻게 사건이 전개되어 결말이 날지 알고 있으니 그렇다.

 

매그레 시리즈 스타일은 이 소설을 시작으로 해서 거의 변화가 없다.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고 반장은 추적하고 범인은 잡히고 반장과 범죄자는 서로 얘기하고 감동과 후일담으로 끝난다. 범죄 수수께끼를 추리해서 맞추는 재미는 많지 않다. 매그레 반장이 그냥 알았다고 말할 정도니.

 

소설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사건이 긴박하게 전개된다. 시작부터 총격 사망 사건이다. 관련 용의자들이 계속 움직인다. 반장은 용의자를 추적하다가 총에 맞아 죽을 뻔한다. 반장의 부하 한 명은 살해당한다. 처음 읽는 독자는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범인을 동정하는 형사라니. 범죄자의 지난 인생 이야기는 씁쓸하다.

 

Posted by 목소리 좋은 빅보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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