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밑바닥에서 도달했을 때, 당신의 결론은? 전도서가 독자한테 던지는 질문이다. 이는 당신이 신을 믿든, 믿지 않든, 혹은 아무 관심도 없든 한 번쯤은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솔로몬은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졌다. 여자면 여자, 돈이면 돈, 지혜면 지혜, 권력과 명예까지.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은 "난 행복해."가 아니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조금 더 자세히 읽어 나아가면, 삶의 진실을 무섭도록 솔직하게 내뱉는다. 정의가 승리한다? 내가 겪어 보니까 전혀 안 그렇더라.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근본적으로 우린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세상 일은 언제든 어떻게든 일어나거든.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글쓴이는 더 생각할 수 없는 벽에 이르자 비약해 버린다. 자, 그렇게 삶은 허무한 것이니 신을 믿어라. 이는 감정적 설득이다. 결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했던 주장과 통한다. 삶의 비참함에 빠지느니, 신을 믿겠다. 유한 존재 인간이 어떻게 무한 존재 신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신을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난 믿겠어.

신을 믿으면 일이 잘 풀리고 행복해진다는 말은 전도서에 단 한 마디도 없다. 가장 많이 말하는 사실은 사는 게 참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게 글의 대부분이다. 신을 믿으라는 전도의 말씀은 고작 몇 줄이다. '전도서'라는 제목이 무색할 지경이다.

핵심은 3장 11절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경건한 마음으로 영원한 신을 믿는다. 이 종교적 태도는 불확실한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다음에야 온다. 갑자기 신의 존재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살펴 보라. 어떤 일을 겪은 후, 그저 믿게 된다. 거기에는 확실한 인과관계가 없다. 신을 경배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행운일 수도 불행일 수도 있다. 

전도서는 당신에게 신을 경배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자, 지금껏 산다는 게 뭔지 봤지. 별 의미가 없어. 결국엔 우리는 사라지지. 당신이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어. 나는 어떻게 하겠냐고? 신을 경외하고 따르겠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의 마지막 말씀은 필연적이지 않다. 그저 선택일 뿐이다. 그런 선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자, 당신의 선택은?

우리 존재의 신비는 허무와 영원을 인식하는 능력에 있다. 전도서는 그 점을 말할 뿐이다.

 

Posted by 목소리 좋은 빅보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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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짜라투스트라 2014.10.30 15: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나 믿음이 믿음이 되기 위해선 회의와 의심을 통한 확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단순한 이성적 논리적 합리적 확증이 아닌, 직관과 체험을 통한 확증이,, 필요한 것이지요..